다네모 마사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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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네모 마사유키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코치로, 포수로서 활약했다. 시즈오카 고등학교와 릿쿄 대학을 거쳐 1961년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입단하여 1962년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한큐 브레이브스로 이적 후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코치, 2군 감독, 스카우트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일본 티볼 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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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네모 마사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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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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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시즈오카현 이와타시 |
생년월일 | 1938년 2월 13일 (86세) |
신장 | 175 |
체중 | 73 |
포지션 | 포수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년도 | 1961년 |
첫 출장 | 1961년 9월 2일 |
마지막 출장 | 1974년 9월 26일 |
선수 경력 | |
선수 | 마루젠 석유 도에이 플라이어스 (1961년 ~ 1971년) 한큐 브레이브스 (1972년 ~ 1974년) |
참가 팀 | 도에이 플라이어스 (1961년 ~ 1971년) 한큐 브레이브스 (1972년 ~ 1974년) |
감독/코치 경력 | |
코치 | 한큐 브레이브스 (1975년 ~ 1977년) 닛폰햄 파이터스 (1981년 ~ 1988년, 1993년 ~ 1995년) |
추가 정보 | |
학력 | 시즈오카현립 시즈오카 고등학교 릿쿄 대학 |
사회인 야구 | 마루젠 석유 |
2. 선수 시절
다네모 마사유키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하여 중학교 때 포수로 전향했다. 시즈오카 고등학교와 릿쿄 대학을 거쳐 사회인 야구팀 마루젠 석유에서 활동한 후, 1961년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입단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도에이 시절에는 팀의 창단 첫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하며 시리즈 MVP를 수상했고, 타카하시 요시마사의 퍼펙트 게임을 어시스트하기도 했다. 1972년 한큐 브레이브스로 이적하여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수상했으며, 1974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2. 1. 프로 입단 전
양복점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즈크 천 조각으로 글러브를 만들어 준 것을 계기로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2] [3] 처음에는 투수였으나, 이와타 제1중학교 재학 중 포수로 전향했다.[3] 3학년 때인 1952년, 현 대회 준우승을 이끈 활약을 인정받아 10월에 시즈오카 시내의 중학교로 전학했다.[3]시즈오카 고등학교에서는 1학년 때인 1953년부터 주전 포수를 맡았다. 3학년 때인 1955년에는 주장을 맡아 여름 고시엔 시즈오카 대회에 출전했다. 팀은 제8시드였음에도 불구하고 준결승에서 전년도 전국 준우승팀인 시즈오카 상업고등학교를, 결승에서 누마즈히가시 고등학교를 꺾고 산세이 대회에서도 우승했다.[3] 하지만 본선 대회에서는 개막전 1회전에서 조토 고등학교에 3-0으로 1안타 완봉패를 당했다.[3] 당시 팀에는 1년 선배인 곤도 하루히코가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56년 릿쿄 대학에 진학하여 스기우라 타다시, 혼야시키 킨고, 나가시마 시게오의 2년 후배로 입부했다.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서는 3학년 가을까지 1년 선배인 카타오카 히로오의 백업 포수를 맡았다. 이 기간 동안 팀은 1957년 봄부터 1958년 가을까지 리그 4연패를 달성했고,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도 2연패를 경험했다. 4학년 때인 1959년 봄부터 주전 포수를 맡아 처음으로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리그 통산 성적은 29경기에 출전하여 93타수 18안타, 타율 .194, 1홈런을 기록했다. 대학 동기로는 모리타키 요시미, 하마나카 요시카즈, 타카바야시 츠네오, 이나가와 마코토 등이 있다.
대학 시절 통산 타율은 1할대에 머물러 타격은 부진했지만, 뛰어난 수비력으로 프로 구단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1960년 사회인 야구팀인 마루젠 석유에 입사했다. 오카다 에츠야 감독의 지도를 받았고, 니시 미츠오, 이와가미 코사사와 배터리를 이루었다. 입사 첫해부터 4번 타자 겸 포수로 기용되어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출전했으나, 2회전에서 후지 중공업에게 패했다(본인은 2안타 기록).[4] 같은 해 9월에는 전일본 사회인 야구 선발팀의 일원으로 하와이 원정에 참가했다.[4] 2년차인 1961년에는 도호 레이온 도쿠시마 팀의 보강 선수로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출전했다.[4]
2. 2. 도에이 플라이어스 시절 (1961년 ~ 1971년)
마루젠 석유를 거쳐 1961년 8월 도시 대항 야구 대회 종료 후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입단했다. 같은 해 9월 23일 긴테츠와의 경기(니혼 생명 구장)에서 안도 준조의 대타로 처음 출장했지만, 시즌 도중 합류였기에 1년차에는 1경기 출전에 그쳤다.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4월 15일 니시테쓰와의 경기(고라쿠엔 구장)에서 와카오 타다오를 상대로 첫 안타를, 이노우에 요시오를 상대로 우전 적시타를 쳐 첫 타점을 기록했다. 이후 출전 기회를 점차 늘려가며 4월 18일에는 8번 타자 겸 포수로 처음 선발 출장했다. 안도 모토히로와 번갈아 출전하면서도 도바시 마사유키, 토미나가 카쿠로, 쿠보타 오사무, 오자키 유키오, 안도 모토 등 투수진을 안정적인 리드로 이끌며 팀의 창단 첫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한신 타이거스와의 1962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시리즈 3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부터 안도를 대신해 선발 마스크를 썼다. 비록 3차전은 무승부로 끝났지만[3], 4차전에서는 코야마 마사아키를 상대로 역전 2점 적시타를 터뜨렸고, 5차전(고라쿠엔 구장)에서는 무라야마 미노루, 이시카와 미도리를 상대로 3타수 2안타, 6차전(한신 고시엔 구장)에서는 무라야마를 상대로 다시 한번 역전 2점 적시타를 기록하는 등[3] 팀의 4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과감한 리드와 결정적인 순간의 타격[5]으로 시리즈 5경기에서 14타수 5안타(타율 .357, 팀 내 2위), 6타점을 기록했다.[3]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팀 동료 도바시 마사유키와 함께 일본 시리즈 사상 최초의 공동 MVP로 선정되었으며, 포수로서는 최초의 MVP 수상이었다.[6] 시리즈 후에는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 도바시, 하리모토 이사오와 함께 10월 22일 후지 TV의 프로그램 《스타 천일야》에 출연하기도 했다. 같은 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가 방일한 1962년 미일 야구에서는 18경기 중 4경기에 출전했다.
이 활약으로 주전 포수로 정착할 것으로 보였지만, 타격의 부진이 과제가 되어 병용이 이어진다. 리드는 정평이 있었지만, 베테랑인 안도나 타력에서 우위인 하쿠닌텐과 병용되는 케이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63년 5월 12일 한큐와의 경기(도쿄)에서 요네다 테츠야를 상대로 첫 홈런을 날렸다.[7] 1964년에는 난카이 전에서 사가 켄시로와 배터리를 이루어, 히로세 토시오의 도루를 저지했고, 경기 종료 후 밤에는 "히로세를 잘 아웃시켜줬다"며 미즈하라에게 식사를 대접받았다.
단정한 외모로 여성 팬의 인기도 높았기 때문에 "마스크를 쓰는 것이 아깝다"는 이유로 컨버트 안도 나왔지만, 1966년에는 그 상황에서 분발하여 정포수 자리를 굳히자, 자기 최다인 132경기에 출장하여 규정 타석에도 도달했다. 자기 최고이자 리그 5위의 타율 .291을 기록했고, 자신 유일의 올스타전에도 출장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브라질 원정 멤버로 선출되어, MLB 선발 및 파나마 선발과 대결했다[8]。
1967년 4월 25일 도쿄 전(도쿄)에서는 사카이 카츠지에게 9회까지 노히트 노런으로 막히고 있었지만, 0-0으로 연장전에 돌입한 10회에 센터 오버 3루타를 쳐서 노히트를 저지했다. 리드에서는 모리야스 토시아키의 완봉 승리를 어시스트했지만, 한편 사카이는 노히터는커녕 패전 투수가 되었다[9]。
1969년에는 부진도 있어 스즈키 노리오와 병용되었지만, 4월 23일 난카이 전(오사카)에서 와타나베 타이수케를 상대로 첫 만루 홈런을 날렸다. 같은 해에는 1년차인 타카하시 나오키에게 "너의 결정구는 뭐냐?"라고 묻고, "슈트입니다"라고 대답한 타카하시에게 "슈트를 끝까지 던져서 후회는 없겠지"라고 조언했다. 자신의 방향성이 정해진 타카하시는 13승을 거두었고, 항상 타네모와 짝을 이루게 되었다[10]。
1971년까지 정포수 자리를 지켰고, 5월 25일 난카이 전(고라쿠엔)에서는 미우라 키요히로・사토 미치로를 상대로 자신 유일의 1경기 2홈런을 기록했다. 8월 21일 니시테츠 전(고라쿠엔)에서는 타카하시 요시마사의 프로 야구 사상 12번째의 퍼펙트 게임[11]을 어시스트했고, 자신도 2루타를 포함 4타수 3안타를 기록했다. 같은 해에는 도에이 전에서 20도루를 기록한 후쿠모토 유타카의 도루 실패 8개 중 6개를 저지했지만[12], 이 무렵에는 타미야 켄지로 감독의 야구관에 위화감을 느껴[2], 1971 시즌 종료 후 오카무라 코지・사카모토 토시조와 정포수-정유격수끼리의 교환 트레이드로, 오하시 미노루와 함께 한큐 브레이브스로 전격 이적했다.
2. 3. 한큐 브레이브스 시절 (1972년 ~ 1974년)
1972년, 오카무라 고지와의 맞트레이드를 통해 한큐 브레이브스로 이적했다. 이적한 해에 곧바로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수상했으며, 1974년에 14년간의 현역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은퇴했다.3. 은퇴 후
은퇴 후에는 한큐 브레이브스와 닛폰햄 파이터스에서 배터리 코치, 2군 감독 외에도 스카우트, 전력분석원 등 다양한 보직을 거쳤다. 현재는 일본 티볼 협회의 이사를 맡아 수도권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등에서 티볼 보급 활동을 펼치고 있다.
3. 1. 지도자 경력
- 한큐 브레이브스 타격 코치(1975년 ~ 1977년)
- 닛폰햄 파이터스 코치(1981년 ~ 1983년)
- 닛폰햄 파이터스 2군 감독(1984년 ~ 1988년, 1993년 ~ 1995년)
4. 상세 정보
(내용 없음)
4. 1. 출신 학교
- 시즈오카 현립 시즈오카 고등학교
- 릿쿄 대학
시즈오카 현립 시즈오카 고등학교에서는 1학년(1953년)부터 주전 포수를 맡았고, 3학년(1955년)에는 주장을 맡아 여름 고시엔 시즈오카 대회에 출전했다. 준결승에서 전년도 전국 준우승팀인 시즈오카 상업고를, 결승에서 누마즈히가시 고교를 꺾고 산세이 대회에서도 우승했다[3]. 제37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 본선에서는 개막전 1회전에서 조토 고교와 맞붙었지만, 3-0으로 1안타 완봉패를 당했다[3]. 1년 선배 팀 동료로 곤도 하루히코가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56년 릿쿄 대학에 진학하여 스기우라 타다시, 혼야시키 킨고, 나가시마 시게오의 2년 후배로 야구부에 입부했다. 도쿄 6대학 리그에서는 3학년(1958년) 가을까지 1년 선배인 카타오카 히로오의 백업 포수를 맡았고, 2학년(1957년) 봄부터 1958년 가을까지 리그 4연패와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2연패를 경험했다. 4학년(1959년) 봄부터 주전 포수를 맡아, 생애 첫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 리그 통산 29경기에 출장하여 93타수 18안타, 타율 .194, 1홈런을 기록했다. 동기로는 모리타키 요시미, 하마나카 요시카즈, 타카바야시 츠네오, 이나가와 마코토 등이 있다.
4. 2. 선수 경력
양복점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즈크 조각으로 글러브를 만들어준 것을 계기로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2] [3]。 처음에는 투수였지만, 중학교 시절(이와타 제1중) 포수로 전향했다[3]。 3학년(1952년) 현 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둔 활약을 인정받아, 10월 시즈오카 시내의 중학교로 전학했다[3]。시즈오카 고등학교에서는 1학년(1953년)부터 주전 포수를 맡았고, 3학년(1955년)에는 주장을 맡아 여름 고시엔 시즈오카 대회에 출전했다. 제8시드였음에도 불구하고 준결승에서 전년도 전국 준우승팀인 시즈오카 상업고를, 결승에서 누마즈히가시 고교를 꺾고 산세이 대회에서도 우승했다[3]。본 대회에서는 개막전 1회전에서 조토 고교와 맞붙었지만, 3-0으로 1안타 완봉패를 당했다[3]。 1년 선배 팀 동료로 곤도 하루히코가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1956년) 릿쿄 대학에 진학하여, 스기우라 타다시, 혼야시키 킨고, 나카시마 시게오의 2년 후배로 입부했다. 도쿄 육대학 리그에서는 3학년(1958년) 가을까지 1년 선배인 카타오카 히로오의 백업 포수를 맡았고, 2학년(1957년) 봄부터 1958년 가을까지 이어진 리그 4연패와 전일본 대학 선수권 2연패를 경험했다. 4학년(1959년) 봄부터 주전 포수를 맡아, 생애 첫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 리그 통산 29경기에 출장하여 93타수 18안타, 타율 .194, 1홈런을 기록했다. 동기로는 모리타키 요시미, 하마나카 요시카즈, 타카바야시 츠네오, 이나가와 마코토 등이 있다.
통산 타율은 1할대에 머물러 타격은 저조했지만, 뛰어난 수비력으로 프로에서도 주목받았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1960년) 마루젠 석유(현 코스모 석유)에 입사했다. 오카다 에츠야 감독의 지도를 받았고, 니시 미츠오, 이와가미 코사사와 배터리를 이루었다. 입사 첫해부터 4번 타자 겸 포수로 기용되어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출전했지만, 2회전에서 후지 중공업에게 패배했다[4]。 그 해 9월에는 전일본 사회인 야구 선발팀의 일원으로 하와이 원정에 참가했다[4]。 2년차(1961년)에는 도호 레이온 도쿠시마의 보강 선수로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출전했다[4]。
1961년 8월 도시 대항 야구 대회 종료 후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입단하여, 같은 해 9월 23일 긴테츠 전(니혼 생명 구장)에서 안도 준조의 대타로 프로 첫 출장을 기록했다.
첫 해에는 시즌 중 합류로 1경기 출전에 그쳤지만, 2년차인 1962년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4월 15일 니시테쓰 전(고라쿠엔 구장)에서 와카오 타다오를 상대로 첫 안타를, 이노우에 요시오를 상대로 우전 적시타를 쳐 첫 타점을 기록했다. 이후 경기에서도 꾸준히 활약하며 출전 기회를 늘려갔다. 도바시 마사유키, 토미나가 카쿠로, 쿠보타 오사무, 오자키 유키오, 안도 모토히로 등 투수진을 안정적인 리드로 이끌며 구단 사상 첫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한신과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10월 16일 3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부터 선발 마스크를 썼고, 4차전(진구)에서는 코야마 마사아키를 상대로 역전 2점 적시타를 날렸다. 5차전(고라쿠엔 구장)에서는 무라야마 미노루, 이시카와 미도리를 상대로 3타수 2안타, 6차전(한신 고시엔 구장)에서도 무라야마를 상대로 역전 2점 적시타를 치는 등 팀의 4연승을 이끌었다[3]。 과감한 리드와 결정적인 타격[5]으로 5경기에서 14타수 5안타, 타율 .357, 6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3]。 이 활약으로 일본 시리즈 우승 당시 헹가래 투수였던 도바시 마사유키와 함께 사상 유일의 더블 MVP를 수상했으며, 포수가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한 것도 최초였다[6]。 시리즈 후에는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 도바시, 하리모토 이사오와 함께 후지 TV의 프로그램 『스타 천일야』에 출연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가 방일한 미일 야구에서는 18경기 중 4경기에 출전했다.
이 활약으로 주전 포수로 자리 잡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타격 부진으로 인해 베테랑 안도 준조나 타격이 좋은 하쿠닌텐과 번갈아 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1963년 5월 12일 한큐 전(도쿄 스타디움)에서 요네다 테츠야를 상대로 프로 첫 홈런을 기록했다[7]。 1964년에는 난카이 전에서 사가 켄시로와 배터리를 이루어 히로세 토시오의 도루를 저지하기도 했다.
단정한 외모로 여성 팬들에게 인기가 많아 마스크를 쓰는 것이 아깝다는 이유로 포지션 변경 이야기도 나왔지만, 1966년에는 주전 포수 자리를 확고히 하며 개인 최다인 132경기에 출장하여 규정 타석을 채웠다. 개인 최고이자 리그 5위인 타율 .291을 기록했고, 유일하게 올스타전에도 출전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브라질 원정 멤버로 선발되어 MLB 선발팀 및 파나마 선발팀과 경기를 치렀다[8]。
1967년 4월 25일 도쿄 전(도쿄 스타디움)에서는 상대 투수 사카이 카츠지에게 9회까지 노히트 노런으로 막혔으나, 0-0으로 맞선 연장 10회에 중견수 키를 넘기는 3루타를 쳐 노히트 노런을 저지했다. 이 경기에서 모리야스 토시아키의 완봉승을 도왔지만, 사카이는 패전 투수가 되었다[9]。
1969년에는 부진으로 스즈키 노리오와 번갈아 출전했지만, 4월 23일 난카이 전(오사카 스타디움)에서 와타나베 타이수케를 상대로 첫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 같은 해 신인 타카하시 나오키에게 결정구에 대해 조언하며 그의 성장을 도왔고, 이후 타카하시와 자주 배터리를 이루었다[10]。
1971년까지 주전 포수 자리를 지켰다. 5월 25일 난카이 전(고라쿠엔 구장)에서는 미우라 키요히로, 사토 미치로를 상대로 개인 유일의 한 경기 2홈런을 기록했다. 8월 21일 니시테쓰 전(고라쿠엔 구장)에서는 타카하시 요시마사의 프로 야구 통산 12번째 퍼펙트 게임[11]을 어시스트했으며, 타네모 본인도 2루타를 포함해 4타수 3안타를 기록했다. 같은 해 도에이 전에서 20도루를 기록한 후쿠모토 유타카의 도루 실패 8번 중 6번을 저지하기도 했다[12]。 그러나 당시 타미야 켄지로 감독의 야구관에 위화감을 느껴[2], 1972년 오카무라 코지, 사카모토 토시조와의 주전 포수-주전 유격수 간의 맞트레이드로 오하시 미노루와 함께 한큐 브레이브스로 이적했다.
한큐에서도 주전 포수가 되어 7월 5일 니시테쓰 전(헤이와다이 야구장)에서 개인 통산 1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6년 만에 규정 타석을 채우고 타율 .271(리그 20위)를 기록하며 팀의 리그 2연패에 공헌했고, 제1회 다이아몬드 글러브상(포수 부문)을 수상했다. 요미우리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전 5경기에 선발 출전하여 11타수 3안타를 기록했다. 당시 배터리를 이뤘던 야마다 히사시에 따르면, 타네모는 투수의 의사를 존중하는 리드를 했다[13]。 한큐 시절 캠프 환경은 도에이 시절보다 훨씬 좋았다고 회상했다[2]。
1973년에는 오카다 코우키와 주전 자리를 놓고 경쟁했지만, 102경기에 출전하며 주전 자리를 지켰다. 5월 11일 친정팀 도에이의 후신인 닛타쿠 전(고라쿠엔 구장)에서 우다 히가시시게를 상대로 개인 통산 두 번째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7]。 8월 26일 난카이 전(니시노미야 구장)에서 나카야마 코이치를 상대로 마지막 홈런을 쳤다. 난카이와의 플레이오프에서는 전 5경기에 출장했지만, 3경기는 오카다에게 선발 마스크를 양보했다.
1974년에는 나카자와 신지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었고, 마지막 출전 경기가 된 9월 26일 롯데 전(미야기 구장)에서는 5번 타자로 출전하여 카네다 토시히로를 상대로 마지막 안타를 기록했다. 롯데와의 플레이오프에서는 3경기 중 2경기에 출전했다. 코치를 겸임하게 된 1975년에는 1군 출전 없이 시즌을 마감하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인 11월 8일, 도쿄 6대학 야구 연맹 결성 50주년 기념 경기인 프로 OB 홍백전[14] 멤버로 선출되어, 모교 대선배인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이 이끄는 홍군의 선수로 출전했다.
4. 3. 수상 및 타이틀 경력
4. 4. 개인 기록
; 첫 기록- 첫 출장 : 1961년 9월 2일, 대 긴테츠 버펄로 23차전(니세이 구장), 8회초에 안도 준조의 대타로서 출장
- 첫 타석 : 상동, 8회초에 에자키 테루오로부터 삼진
- 첫 안타 : 1962년 4월 15일, 대 니시테츠 라이온즈 2차전(고라쿠엔 구장), 6회말에 와카오 타다오로부터
- 첫 타점 : 상동, 8회말에 이노우에 요시오로부터 우전 적시타
- 첫 선발 출장 : 1962년 4월 18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2차전(고라쿠엔 구장), 8번·포수로서 선발 출장
- 첫 홈런 : 1963년 5월 12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10차전(도쿄 스타디움), 4회말에 요네다 테츠야로부터 좌월 솔로
; 획기적인 기록
- 통산 1000경기 출장 : 1972년 7월 5일, 대 니시테츠 라이온즈 11차전(헤이와다이 야구장), 7번·포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160번째
; 기타 기록
- 올스타전 출장 : 1회(1966년)
4. 5. 등번호
- '''67''' (1961년)
- '''22''' (1962년 ~ 1975년)
- '''66''' (1976년 ~ 1977년)
- '''88''' (1981년 ~ 1988년)
- '''80''' (1993년 ~ 1995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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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井ゴールデングラブ賞 歴代受賞選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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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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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スポーツと健康‐元プロ野球選手に学ぶ‐」 講師:種茂 雅之 氏 1/19 講演テーマ:「スポーツと健康-元プロ野球選手に学ぶ-」講師:種茂 雅之(たねも まさゆき)氏
http://chinoichib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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静中・静高創立125周年 高きを仰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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種茂雅之、全本塁打一覧|本塁打大全 : クラシックSTATS鑑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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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本勲26歳、大リーガーをメッタ打ち! 打率.568の三冠王 “伝説の1966年ブラジル遠征”【現地紙で発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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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健闘坂井、また悲劇 九回を無安打、十回ダウ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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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38回 高橋直樹「母親のおかげでここまでやれた」 | 野球コラ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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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回も持たないだろう…ところが…高橋善正、完全試合達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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走りまくる阪急・福本豊、狙いは「100盗塁」だ!/週べ回顧1972年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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読む野球-9回勝負-No.7 (主婦の友生活シリー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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イップス 魔病を乗り越えたアスリートた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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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月28日】1984年(昭59) 植村義信監督 近鉄戦未勝利で辞任 後見人・大沢親分急復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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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ポーツニッポ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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プロ初安打が初本塁打!これは夢なのか…とダイヤモンドを1周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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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イップスの深層】1日1000球の秘密特訓で、ガンちゃん奇跡の復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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